"너, 정말 많이 힘들겠다. 나도 그 느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아.

네가 그렇게 힘들어 하니까 나도 같이 힘든 것 같아."

 

이렇게 상대가 여러분과 함께 같은 느낌을 느낀다고 해주면,

참 고마운 친구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동정의 마음을 자주 표현하는 경우

우리는 점점 그 진정성을 느끼기가 어려워집니다.

어느새 상대방이 표현하는 동정의 마음은 피상적으로 느껴집니다.

게다가 우리의 깊은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얕은 느낌을 가지게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동정하는 친구의 위치와 우리의 위치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위치는 웅덩이 위 안전한 곳에 있고,

우리의 위치는 웅덩이 아래 비참한 현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안전한 웅덩이 위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위험한 곳까지

스스로 내려와 준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든든한 동반자를 얻는 기분이 들 것입니다.

공감은 바로 이런 상호적인 연대감을 느끼는 과정입니다.

 

공감의 과정이 이렇게 상대방의 웅덩이로 천천히 내려가서

결국 감정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서는 일이라고 한다면,

너무 급하게 내려가서도 안 됩니다.

천천히 웅덩이 아래로 내려가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다면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결국 웅덩이 밑바닥에서 만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부둥켜안고 우는 일입니다.

웅덩이 바닥에 있는 구심력 감정과 온건한 감정을 공감할 때

뜨거운 치유의 눈물이 흐르는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 권수영 저, <공감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중에서

 

스승은 예언자가 아니다. 예언자가 되려 해서도 안 된다.

어쩌면 예언자 같은 스승이 가장 위험하다.

제자를 성장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자기 식대로 재단하고 낙인찍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명한 스승은 좀처럼 예언하지 않는다.

대신에 제자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제자가 자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예언자와 스승은 소통 방식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고정된 미래를 가리키는 예언자는

질문보다는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대화보다는 단정적으로 명령한다.

그에 비해 ‘스승’은

질문하고, 경청하고, 공감하며 대화를 나눈다.

 

-홍승환 <스승이 필요한 시간>중에서

여러분의 인생에서는 나를 알아봐주었던 훌륭한 스승이 있었나요? 평생에 한번 만나기 어렵다는 ‘진정한 스승’.

오늘 하루, 나의 인생에서 나를 ‘더 나은 나’로 이끌어 준 스승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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