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밑까지 잘랐던 머리가
어느새 어깨까지 자라 자꾸만 뒤집어진다.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껴입었던 옷들을
이제 옷장 속으로 넣는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설레던 마음이
이제 내리는 꽃비에 설렌다.
계절은 변하고 다시금 돌아온다.
민들레꽃은 날아갔고,
그 씨앗들은 다음 봄을 기다리며 땅에 숨었다.

차갑고 하얗게 변했던 모든 것들의
색이 돌아오고 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 이제 봄이다.
그러니 돌아왔으면 좋겠다.
이맘때 내가 사랑했던 당신도.

-서신애 에세이, <마음의 방향> 중에서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오기 시작한다면, 우리나라는 ‘삼복’을 거쳐야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가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초복, 중복, 말복을 ‘삼복’이라 부르는데요. 이때 ‘복’의 의미는 엎드릴 복(伏)자로 가을이 여름을 밟고 올라오려고 하지만 결국 더위에 굴복해 엎드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무더위에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는 사람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삼복은 매년 7~8월 사이를 지나고 올해 초복은 7월 11일로 본격적인 여름 더위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초복과 말복은 열흘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간에 삼복을 지납니다.

 

예로부터 삼복은 사람들에게 행운과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날로 여겨져 왔는데요. 우리나라는 본래 농업사회였고 그로 인한 영향이 사회와 문화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초복은 여름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기도 해서, 작물의 성장과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는 것이죠.
여름의 중심으로 갈수록 더욱 무성해진 초목은 그늘의 특권을 우리에게 허락하기도 합니다. 온몸이 땀에 절고 기운 빠진 모두에게 쉼의 시간은 무척 달콤한 시간입니다. 이제 몸을 조금 쉬었다면 기력을 보충해 주어야 할 텐데요. 역시 더위를 이기는 것도 이열치열입니다. 이렇게 더운 날에, 펄펄 끓는 더운 음식이라니, 이 정도면 더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라 조화를 이루어가는 복날의 먹거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중병아리를 잡아, 영계백숙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팥죽을 쑤어 먹기도 했는데요.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뜨거운 불 앞도 마다하지 않는 지난 세월의 어머니들 정성에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합니다.
근래에 들어서는 닭은 물론, 전복, 낙지, 문어 홍합 등을 잔득 넣은 해신탕을 즐기기도 합니다. 바다의 신들이 먹었다 해서 ‘용궁해신탕’이라 불리기도 하지요. 치킨을 먹는 것은 또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입니다. 그렇다면 채식을 즐겨 드시는 분들은 어떤 먹거리로 몸을 보양하는지 궁금하기도 한데요. 쫄깃쫄깃한 식감을 가진 버섯이 등장합니다. 노루궁뎅이버섯 보양탕이나 들깨버섯탕을 푹 끓여 먹기도 하고요. 식성에 따라 오이초밥으로 가볍게 더위를 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지켜온 날들에 가족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둘러앉습니다. 먼저는 열심히 일군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고, 가족의 건강과 사랑을 북돋는 것이죠. 초복과 복날은 풍수지리와 관련된 전통적인 믿음도 담고 있었는데요. 특정한 천체의 이동과 계절 변화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날에 특정한 음식을 먹거나 행사를 거행하여 길을 열고 풍요를 누리는 것을 믿는 전통이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은 행운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발화된 풍속들입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사계절을 온 정성으로 맞이하되, 그것을 누리는 우리는 기꺼운 마음이 됩니다. 즐겁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이죠. 갈수록 지구는 더워지고, 후덥지근한 여름날은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의욕상실은 날씨를 탓하기 딱 좋을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옛 선조들처럼 조금 더 지혜롭고 너그러운 미래의 선조가 되길 바라봅니다. 그들은 조금 나중과 아주 먼 미래를 위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굴복시키거나 굴복 당하지 않고 적당한 거릴 유지하며 받아들였던 거죠. 삼복의 더위를 이기지 못한 가을이 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더위를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한 여름 밤을 만끽할 수 있는 낭만의 계절이니까요!

 

출처 :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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