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벌 숙녀 마틸다 칼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출근 준비를 할 때, 옷 고르는 시간을 빼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에 더 집중하게 되며, 스스로를 의식할 필요도 없어진다고 한다.

단벌 숙녀 마틸다가 옷 선택으로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실제로 그녀가 옷을 고르고 입는 시간은 45초라고 한다.)

소유가 적을수록 불만이 줄어든다. 반대로 소유하면 할수록 욕망이 커진다.

심지어는 사방이 물건으로 둘러싸여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더 소유하길 원한다.

때로는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비싼 옷이 옷장에 걸려 있기에 입어 줘야 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사도 바울의 가르침, 자족을 생각해 볼 일이다.

 

자족은 가진 것이 별로 없을지라도,

넉넉히 가진 사람처럼 만족할 수 있는 상태이다.

다 가졌으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는 현대인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아무것도 없는 방까지는 아니어도, 무소유까지는 아니어도,

'어설픈' 미니멀리스트 정도는 되고 볼 일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 아름다운 절약을 선택해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자족하며 사는 것은 소소한 기쁨을 위해 잠시 일을 내려놓는 것이다.

숲을 산책하며 명상하는 것이다. 해질 녘 석양을 보며 감사하는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 속에서 순간순간 만족 하는 것이다.

 

- 심플빈 저, <단순하게 산다는 것> 중에서

 

 

‘돈을 버는 일’과 ‘좋아하는 일’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면,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직업이라는 건 그저 선택의 문제예요.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심지어 성공한다는 건

판타지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꾸준한 회사생활로 일단의 성공을 쟁취하는 것도 무척 어렵지요.

일의 세계를 그 둘로 간단히 나눠버릴 수도 없습니다.

일이라는 단어의 결은 무한에 가까워요.

우주에 가까운 경우의 수가 존재합니다.

 

그러니 너무 진지해지지 마세요.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에 속지 마세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세상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 꾸준히 빈틈을 찾으세요.

내면에 집중하며 외부에 대한 관심을 잃지 마세요.

일은 그 첨예한 틈, 공들여 해낸 것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영역 어딘가에서

언젠가 빛날 거라 믿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겁니다.

저는 조금 더 먼 곳에 깃발을 꽂아두려고 해요.

 

그래야 오래 달릴 수 있으니까. 인생은 길고

첫 직장이나 두 번째 직장, 20대에 선택한 직업이

평생을 결정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 정우성 저, <산책하듯 가볍게> 중에서

 

 

 

산다는 것은 주어진 운명에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근육을 단련시키듯이 조금씩 발전하고 혁신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설정하여 조금씩 완성해 가는 것이다.

요즘 PT 수업을 받는다. 트레이너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덤벨 무게를 조금씩 올리며 꾸준히 훈련하라는 것이다.

지속적인 훈련 없이는 멋진 몸, 탄력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깨라고 말한다.

 

단순한 생활도 마찬가지다. 심플 라이프로 방향을 설정했다면

이 또한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수정하고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연습해야 한다.

다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단순한 생활이 정착되기 시작하면 삶의 충만함과 기쁨을 알게 된다.

끊임없이 매너리즘의 틀을 깨고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소한 일에 감사하게 된다. 가벼운 몸과 마음을 갖게 된다.

경쾌한 삶의 리듬으로 의욕이 넘치게 된다.

 

뇌도 이 기쁨을 알게 되어, 자신의 삶을 즐기게 된다.

절제의 품위를 알게 된다. 천천히 그리고 재미있는 삶을 누리게 된다.

이를 위해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단순한 생활은 무 자르듯이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꾸준히 완성해 가는 것이다.

 

- 심플빈 저, <단순하게 산다는 것> 중에서

 

사람들은 미래를 바꿀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앞으로가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매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매일 하는 그 일이 원하는 방향으로 당신을 데려다주지 않는다면,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목표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닙니다.

그 보다는 그것을 얻기 위한 자기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게으른 자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습니다.

일주일 동안 팔에 깁스를 하면 주요 근육 대부분이 힘을 잃게 됩니다.

당신의 뇌는 몸의 다른 부분처럼 피와 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쓰면 쓸수록 발전하고, 쓰지 않으면 퇴보합니다.

 

어떤 일을 능숙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절제 뿐 입니다.

인생은 행동하는 자에게만 보상을 해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 케빈 호슬리 저, <기억력 수업> 중에서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지도를 들고 미지의 땅을 헤매는 여행자 같아요.

누구와 만나고 헤어지든 서로에게 위도와 경도가 된다는 사실이

여행자에게는 얼마나 큰 배움인가요.

 

좋았던 곳은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을 겁니다.

피하고 싶은 곳을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게 크고 작은 경험들을 나만의 지도 위에 새겨둡니다.

사람이 곧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던

크고 작은 상처도 조금씩 아물게 되거든요.

우리가 들고 있는 지도의 크기를 지금은 가늠할 수 없을 테니까.

 

살아있는 한 여행은 끝나지 않고,

내일도 우리는 새로운 누군가와 만나게 될 테니까요.

 

- 정우성 저, <산책하듯 가볍게> 중에서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보통 1.5미터에서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는 듯합니다.

여러분도 까다로운 대화 상대와는 거리를 두고 싶고,

연인과는 가까이 있고 싶을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와의 거리는 ‘관계성’을 나타냅니다.

 

상대와 이야기를 할 때 상대의 퍼스널 스페이스에 무단으로 침입했을 때,

상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거나 몸을 뒤로 젖힌다면

그 사람은 경계심이 강한 타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퍼스널 스페이스 안으로 들어오면 마음의 거리도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퍼스널 스페이스는 사람의 방어 본능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너무 가까이 들어오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거리가 가까워지는 상황을 설정해야 합니다.

 

저녁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마주보고 식사했다면,

2차로 바에 가서는 나란히 앉아 자연스레 거리가 가까워지도록 합니다.

그러면 상대를 정면에서 바라볼 때보다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이는 비즈니스 상황뿐만이 아닌 데이트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테크닉입니다.

 

상대와의 물리적 거리를 조정하면,

사람 간의 관계성까지 컨트롤할 수 있습니다.

 

- 다니하라 마코토 저, <말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질문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없는 질문은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고

그 대답을 들은 자신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죠.

예를 들어 비즈니스 미팅 자리에서

"취미가 뭐예요?'와 같이 요점에서 벗어난 질문을 하면

상대는 기가 차서 미팅을 대충 끝내고 말 것입니다.

신뢰 관계가 생긴 후라면 '피부가 탄 것 같은데,

휴일에 어떤 운동을 하시나요?'와 같은 질문을 해도 괜찮겠지요.

 

그 밖에도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하거나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알 수 있는 시답잖은 질문을 하는 사람도

상대를 짜증나게 만들고 맙니다.

질문은 그저 떠오르는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에 따라 질문의 방법도 달라져야 하지요.

질문으로 이룰 수 있는 결과는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1. 정보를 이끌어낸다.

2. 호감을 얻는다.

3. 사람을 움직인다.

4. 사람을 키운다.

5. 논쟁에서 승리한다.

6. 자신을 컨트롤한다.

 

이제, 하나씩 짚어 보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 다니하라 마코토 저, <말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언제는 사랑을 찾아 깜깜한 밤길을 헤맨 적이 있었다.

긴 새벽이면, 외로움을 못 이겨 방안 가득 불빛을 켜놓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아침은 왔고,

나의 방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이 부실까 촘촘하게 걸어두었던 커튼도

햇빛 앞에 선 소용없는 일이었다.

천막 사이로 빛은 새어 들어 왔고,

뒤척이며 바람을 일으킬 때면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요란하게 출렁이며 나를 깨웠다.

 

그것은 그토록 내가 원하던 사랑이었다.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또 그것이 그리워

긴 새벽 외로움에 떨곤 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때가 되면 알아서 오게 되는 것이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을 넘어 아침이 도래하듯.

자연스럽게 나에게도 오는 것이었다.

또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를 어쩔 수 없이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향해 비추는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부스스한 몸을 일으켜 세워 나를 깨운 그 빛을 바라본다.

눈이 부셔 찡그려보기도 한다. 그러곤 손으로 빛나는 것을 가려본다.

어쩐지 나의 작은 손으로 가리는 것은 도저히 불가했다.

 

안달한다고 해서 오지 않는 것.

하지만 자연스럽게 나에게도 오게 되는 것. 찾을 수 없는 것.

대신할 수 없는 것. 내가 조정할 수 없는 것.

또 나를 깨우는 것. 나를 일으키는 것. 가릴 수 없는 것.

막으려 안간 힘을 써 봐도 자꾸 새어 나오는 것.

 

나에게도 사랑이 온다. 나는 너무 밝은 그것이 불편해 손으로 가려본다.

손 틈새로 흘러들어 오는 너는 막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 정영욱 저, <나를 사랑하는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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